History of Naniwanomiya

고대 일본의 거점, 난바궁.
천황의 거처,
국제 교류가 이루어지고
지금의 오사카로 이어지는 역사의 원점.

  • 발굴된 고대 수도
    나니와노미야

    최초의 본격적인 궁전인 나니와노미야 전기(아스카 시대)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오사카시 중심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우에마치 대지의 최북단 지역에서는 고훈 시대(5세기)에 대규모 창고군(호엔자카 유적)이 조성되었으며, 국제 항구인 나니와즈를 끼고 교역과 교류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그 후 아스카 시대(7세기)부터 나라 시대(8세기)에 걸쳐 나니와노미야 전기 및 나니와노미야 후기 두 시기의 궁전이 건설되었다. 궁전의 중앙 북쪽에는 천황이 거주하는 다이리가, 남쪽에는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과 정무를 수행하는 중추부가 자리했다. 서쪽과 동쪽은 관청(관아) 지구였다. 나니와노미야 전기는 모든 건물이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립주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지붕은 판자로 덮여 있었다. ‘다이카 개신(645년)’으로 불리는 정치 개혁에 발맞춰 나니와로 천도한 후 건설된 나니와노나가라노토요사키노미야로 추정되며,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궁전이었다. 나니와노미야 후기는 나라 시대인 726년부터 쇼무 천황의 명령으로 조영된 궁전이었다.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의 중심 건물은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워졌으며, 지붕에는 동심원무늬 내림새 기와 등의 기와가 덮여 있었다. 744년에는 일시적으로 수도가 되었다.

    후기 난바궁의 내리와 그 중심이 되는 내리정전

    내리 정전의 발굴 조사

    보존된 나니와노미야아토(궁터)

    나니와노미야아토(궁터) 발굴조사는 1954년부터 당시 오사카시립대학을 퇴임한 야마네 도쿠타로 박사(1889~1973)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많은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해당 시기는 고도 경제성장기와 겹치면서, 오사카라는 대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유적 보존이 극도로 어려웠다. 야마네 박사는 끈질기게 보존 운동을 이어 나가 시민의 찬성을 얻었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은 넓은 범위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될 수 있었다. 대도시 중심부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보존된 고고 유적은 일본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니와노미야아토(궁터)는 역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유적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획기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 현장에 서 있는 야마네 도쿠타로 박사

  • 다이리
    천황이 생활하며 정무를 보던 공간

    1954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주오구 호엔자카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 아스카 시대(7세기)부터 나라 시대(8세기)에 걸쳐 나니와노미야 전기 및 나니와노미야 후기 두 시기의 궁전이 건설된 것이 밝혀졌다. 두 궁전 모두 한신 고속도로(주오오도리 도로) 북쪽에서 다이리 유구가 발견되었다. 다이리는 궁전 중심부 북쪽에 위치하며, 천황의 일상생활 공간이자 정무를 보는 공간이기도 했다. 다이리 남쪽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 등이 열리는 공적 공간인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이 자리했다. 다이리의 구조는 주위를 회랑과 담장으로 구획한 격식 있는 공간 안에 중심이 되는 건물을 배치한 형태였다. 다이리 북쪽에는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는 건물과 부속시설이 배치된 구획이 있었다.

  • 나니와노미야 후기의
    다이리 세이덴

    서쪽에서 후기 난바 미야우치리 정전을 바라본다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나니와노미야 후기에서 다이리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 다이리 세이덴이었다. 발굴조사에서 정면 26.9m, 깊이 11.9m의 규모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세운 건물로, 지붕에는 기와를 얹어 중국풍 건축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천황의 거처인 다이리는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립주 건물로, 지붕은 판자 또는 편백 껍질로 덮은 일본 전통 건축 양식이었다. 그 중심이 되는 다이리 세이덴은 고상 구조의 건물로, 사방에 처마가 있고 툇마루와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로 지어진 격식 높은 건축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난바궁의 내리와 그 중심이 되는 내리정전

    내리 정전의 발굴 조사

    내리 정전 정면도(출처:계간 대림 No.31)

  • 나니와노미야 후기의 중추부
    다이리 남쪽에 펼쳐진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

    다이리 세이덴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다이고쿠덴인, 조도인을 조망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궁전 중앙부에 위치하며, 다이리는 천황의 일상생활의 공간이자 정무를 보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중심이 다이리 세이덴 건물이었다.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립주식 고상 구조의 일본 전통 건축 양식을 따르며, 사방에 툇마루와 난간이 둘러져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로 지어진 격식 높은 건물이었다. 다이리 남쪽에는 다이고쿠덴인과 조도인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과 공식 행사가 열렸는데, 다이고쿠덴은 그때 천황이 출어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조도인 중앙에는 귀족과 관료가 줄지어 서는 광장이 있었으며, 양쪽에는 각각 착석하는 건물(조도)이 배치되어 있었다.

    조도인에서 열린 의식을 재현한 이미지

    고가 방식을 포기한 고속도로

    1970년 전후로 나니와노미야 중심부에 오사카 동서 간선도로로서 주오오도리 도로와 한신 고속도로의 건설이 계획되었다. 발굴조사 때 건설 예정지에서 나니와노미야 전기의 중심 건물이자 후세의 다이고쿠덴에 해당하는 다이리 젠덴을 비롯한 많은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면서, 고속도로 설계를 변경하여 지하를 파괴하는 고가 방식을 포기하고 지상을 통과하는 구조로 수정했다. 이에 따라 유구 보존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이리, 다이고쿠덴, 조도인으로 이루어진 나니와노미야 중추부의 시각적 일체감을 유지할 수 있어 전체 경관도 보존할 수 있었다.

    한신 고속도로 건설 전 발굴조사(1977년)

  • 다이리를 구획하는 회랑

    다이리의 구조는 나니와노미야 전기 및 나니와노미야 후기 모두 같았으며, 주위를회랑과 담장으로 구획한 격식 있는 공간 안에 중심이 되는 건물을 배치한형태였다. 다이리 북쪽에는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는 건물과 부속시설이 배치된 구획이 있었다. 역사공원으로 정비하면서 다이리의 범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그 주위를 구획하는 회랑과 담장 등이 있던 자리를 공원길포장으로 표시했다. 빨간색은 시기상 전기를, 흑회색은 후기를 나타낸다. 회랑은 기둥을 3열로 배치한 복랑 구조이며, 기둥 간격은 전기의 경우도리(긴 변) 방향 약 2.9m, 보(짧은 변) 방향 약 2.0m 였다. 후기의 경우 도리 방향 약 3.0m, 보 방향 약 2.4m였다. 색조가 약간 다른 ○ 표시는 기둥이 있던 자리를 나타낸다. 눈앞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다이리 서쪽 회랑과 약 180m 동쪽에 위치한 다이리 동쪽 회랑 사이의 공간이 다이리였다.

    전기 다이리 서쪽 회랑과 외곽의 담장

    전기 다이리 서쪽 회랑과 외곽의 담장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다이리 중심부 북쪽

    다이리는 주위를 회랑과 담장으로 구획한 격식 있는 공간 안에 중심이되는 건물을 배치했다. 다이리 북쪽에는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는 건물과 부속시설이 배치된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남쪽은 주로 정무에 사용되었으며, 북쪽은 사적인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뻗은 양 끝이 담장으로 된 다이리 고덴 북쪽 회랑으로 양쪽이 구획되어 있었다. 담장은 기둥을 1열로 세운 구획 시설이며, 회랑은 기둥을 3열로 배치한 복랑 구조였다. 복랑 중앙 기둥 열은 벽으로 구획되었으며, 양쪽 기둥 열은 벽 없이 트여 있어 사람이 오갈 수 있었다.

    전기 복랑 및 담장의 단면 구조

    발굴조사 풍경(2023년 3월/촬영: 주식회사 시마다구미)

  • 지하에 보존된 지붕 기와
    나니와노미야 후기 다이리 외곽 회랑

    서쪽에서 바라본 지붕 기와 출토 상황(1961년)

    나니와노미야 후기 다이리를 둘러싼 회랑의 한층 더 바깥쪽에서 다이리의 외곽을구획하는 회랑 터가 발견되었다. 기둥을 2열로 배치했지만, 일반적인 단랑 형태가 아니라토담을 수반하는 약간 특수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회랑의 동쪽에서는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와가 바르게 놓인 상태가 아니라거꾸로 뒤집힌 채로 한데 뭉쳐 출토되었다. 기와가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지붕이 뒤집힌 형태로 건물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와 퇴적 유구는 1961년 발굴조사 당시 남북 약 10m 정도가보존 처리 후 출토된 상태 그대로 지하에 보존되었다. 2015년에는 다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함을확인했다.

    동심원무늬 내림새 기와를 사용하여 복원한 지붕

    다이리 안쪽에서 바라본 후기 다이리 서쪽 회랑과 다이리 외곽 회랑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출토된 기와의 보존 처리 모습(1961년)

  • 다이리를 둘러싼 회랑과 문

    다이리의 구조는 나니와노미야 전기 및 나니와노미야 후기 모두 같았으며, 주위를회랑과 담장으로 구획한 격식 있는 공간이었다. 구획을 표시하기 위해 공원길을 나니와노미야 전기는 빨간색으로, 나니와노미야 후기는 흑회색으로 포장했다. 회랑에 있는 색조가 약간 다른 ○ 표시는 기둥이 있던 자리를 나타낸다. 나니와노미야 전기의 회랑은 이 위치에서 동쪽으로 꺾이며 폭이넓어졌다. 그곳에 다이리 출입문이 있었다. 그 문의 동쪽에서 회랑은 다시 남쪽으로 꺾이며 그곳에는 궁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다이리 젠덴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 있다. 눈앞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다이리 서쪽 회랑과 약 180m 동쪽에 위치한 다이리 동쪽 회랑사이의 공간이 전기와 후기 모두 다이리였다.

    구불구불한 전기 다이리 서쪽 회랑에 설치된 다이리 출입문 및 다이리 젠덴 출입문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후기 다이리 서쪽 회랑과 다이리 외곽 회랑

  • 눈앞에 펼쳐진 다이리 공간

    전기·후기 난바궁의 유구 배치

    사적을 정비하면서 다이리의 범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 주위를 구획하는 회랑과·담 등이 있던 자리를 지표면에 공원길 포장으로 표시했다. 나니와노미야 전기를 빨간색, 나니와노미야 후기를 흑회색으로 구분했으며,색조가 약간 다른 ○ 표시는 기둥이 있던 자리를 나타낸다. 전방에는 전기 다이리 중심부를 구획하는 담장과 회랑이 있으며, 북쪽으로더 뻗어 있는 담장은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또 다른 구획의존재를 나타낸다. 남쪽에 있는 동서 방향 전기 회랑 중 폭이 넓어진곳은 다이리 출입문이었다. 발밑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후기 다이리 동쪽 회랑이며, 다이리 세이덴을 사이에 두고약 180m 서쪽에 서쪽 회랑이 있었다. 그 사이의 공간이 후기 다이리였다.

    나니와노미야 전기 다이리의 모습

    나니와노미야 후기 다이리의 모습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다이리 발굴조사(2023년 3월/촬영: 주식회사 시마다구미)

  • 발굴된 고대 수도
    나니와노미야

    1954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주오구 호엔자카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아스카 시대(7세기)부터 나라 시대(8세기)에 걸쳐 나니와노미야 전기 및 나니와노미야 후기 두 시기의 궁전이 존재한 것이 밝혀졌다. 나니와노미야 전기는 ‘다이카 개신(645년)’으로 불리는 정치 개혁에 발맞춰 나니와로 천도한 후 건설된 나니와노나가라노토요사키노미야로 추정되고 있다. 후지와라궁이나 헤이조궁보다 먼저 세워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궁전이다. 나니와노미야 후기는 726년부터 쇼무 천황의 명령으로 조영된 궁전이다. 두 궁전 모두 한신 고속도로(주오오도리 도로) 북쪽에서 다이리 유구가 발견되었다. 다이리는 궁전 중심부 북쪽에 위치하며, 천황의 일상생활 공간이자정무를 보는 공간이기도 했다. 회랑과 담장으로 구획한 격식 있는 공간 안에 중심이 되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니와노미야 전기(아스카 시대) 다이리의 모습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나니와노미야 후기(나라 시대) 궁전 중심부의 모습

  • 전기 나나와궁의 중추부에
    장엄함을 더하는
    다이리 남문과 동·서 팔각전

    아스카 시대(7세기)의 전기 나니와궁은 천황이 일상 생활을 하고 정무를 보는 다이리(内裏)와 예식이나 정무를 하는 조도인(朝堂院)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다이리의 중심 건물인 다이리 전전(前殿)이 조도인의 정전(본전)이기도 하였다. 전기 나니와궁의 건물은 일본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굴립주식(기둥을 땅속에 박아 세우는 건축 방식)이며 지붕은 판자로 이어 만들었다.다이리의 정면에는 위엄있게 보이도록 다이리 남문의 동쪽과 서쪽에 팔각 모양의 누각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건축 설계는 그 전까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궁전 건축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전기 나니와궁은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 궁으로 추정되며, “일본서기”에는 이 궁전을 대하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서쪽에서 바라보는 전기 나니와궁의 중추부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발굴된
    전기 나니와궁의 다이리 남문

    다이리 남문의 발굴조사(빨간색이 다이리 남문, 파란색이 후기 대극전 후전, 1969년)

    전기 나니와궁에서 가장 중요한 구획은 다이리이며, 그 다이리의 정문이 바로 다이리 남문이다. 정면 도리 7칸(약 32.7m), 측면 들보 2칸(약 12.3m)으로, 고대 궁전에 세워진 문으로서는 후지와라궁의 대극전원 남문과 함께 최대 규모다. 동쪽과 서쪽에 배치된 팔각형의 누각과 함께 다이리의 정면을 장식하여 다이리가 위엄있게 보이도록 하였다. 다이리 남문의 남쪽에는 광대한 규모로 조도인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후기 나니와궁 시대에는 이 다이리 남문과 동일한 위치에 대극전 후전(後殿)이 건설되었다. 발굴조사에서 굴립주식으로 세워진 다이리 남문의 주혈(기둥 구멍)이 있던 곳에서 대극전 후전의 기단으로 사용된 응회암을 떼어 낸 흔적이 검출되었다.

    다이리 남문 발굴조사지 원경(1969년)

    남쪽에서 바라보는 다이리 남문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다이리 남문의 주혈(1969년)

  • 후기 나니와궁
    대극전원과 조도인

    나라 시대(8세기) 후기 나니와궁의 중심이 되는 구획은 다이리 및 대극전원과 조도인이다. 대극전원은 다이리의 남쪽, 조도인의 북쪽에 위치하여 있었으며, 대극전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싼 천황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규모는 동서로 약 107m, 남북으로 약 81m에 달한다. 북 회랑의 중앙에는 대극전 후전(後殿)이 있었고, 연결통로로 대극전과 이어져 있었다. 대극전은 조도인의 정전(본전)으로 국가 공식행사나 예식, 외국 사절의 알현 등이 있을 시에 천황이 이곳으로 출어하였고, 조도인의 중앙 광장에 귀족이나 관료가 정렬하였다. 나라 시대의 궁전에서 중심부 건물은 더욱 큰 위엄을 가지도록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쌓아 세웠으며, 지붕은 기와를 이은 중국식 건축 양식으로 만들었다.

    남서쪽에서 바라보는 후기 나니와궁의 대극전원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대극전원의 건물 배치

    대극전 후전의 발굴조사(파란색이 대극전 후전, 빨간색이 전기 다이리 남문, 1969년)

    대극전 뒤쪽에는 대극전 후전(後殿)이 있었다. 천황이 대극전에 출어할 때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둘은 연결통로로 이어져 위에서 보았을 때 가타가나 ‘エ’의 형태였다. 대극전 주변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 회랑은 대극전 후전의 동쪽과 서쪽에 붙어 있는 구조였다. 조도인과의 사이를 구분하는 남면 회랑의 중앙에는 남문(합문)이 있었다. 대극전원의 내부는 바닥을 자갈로 포장하여 격식이 높은 공간이라는 점을 나타냈다.
    대극전 후전은 전기 나니와궁의 다이리 남문과 동일한 위치에 세워졌으며, 발굴조사에서 후전의 기단에 사용된 응회암을 떼어 낸 흔적이 굴립주식으로 세워진 전기 다이리 남문의 주혈(기둥 구멍)과 동일한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대극전 후전 주변의 자갈 바닥과 흩어져 있는 기와(1969년)

    북동쪽에서 본 대극전 후전과 대극전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남쪽에서 본 대극전 합문과 대극전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발굴된 고도, 나니와궁

    1954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로 주오구 호엔자카 일대에서 아스카 시대(7세기)부터 나라 시대(8세기)에 걸친 두 시기의 궁전, 전기 나니와궁과 후기 나니와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전기 나니와궁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645년)에 의하여 나니와로 천도한 후에 건설된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궁으로 추정된다. 후기 나니와궁은 진키 3년(726년)에 쇼무(聖武) 천황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궁전이다.
    고대 궁전의 중심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으로 취급 받은 구획이 바로 다이리 및 대극전원과 조도인이다. 전기 나니와궁은 천황이 일상 생활을 하고 정무를 보는 다이리와 예식이나 정무를 하는 조도인이 하나로 연결된 공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이리의 중심 건물인 다이리 전전(前殿)이 조도인의 정전(본전)이기도 하였다. 한편, 후기 나니와궁의 조도인은 대극전원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국가 공식행사나 예식, 외국 사절의 알현 등으로 천황이 대극전으로 출어하였을 때 귀족이나 관료가 조도인의 중앙 광장에 정렬하였다.

  • 눈 앞에 펼쳐진 조도인의 공간

    대극전원·아사도인 지구 정비 구상도

    조도인은 전기 나니와궁, 후기 나니와궁과 거의 동일한 장소에 만들어졌으며, 중앙에는 귀족이나 관료가 정렬하는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양쪽에는 조도(朝堂)라 불리는 건물 여럿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전기의 건물은 일본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굴립주식에 판자로 이은 지붕의 형태였다. 한편 후기 건물은 더욱 위엄있게 보이도록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와 지붕을 한 중국식 건축 양식이었다. 주위는 회랑과 진흙으로 만든 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조도인의 규모와 넓이를 알기 쉽도록 건물과 회랑, 진흙담의 위치를 지표면에 표시하였다. 둘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전기는 낮은 위치에 빨간색 포장으로 표시하였고, 후기는 기단이 연상되도록 높은 곳에 표시하였다.

    남쪽에서 본 전기 나니와궁 조도인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남쪽에서 본 후기 나니와궁 조도인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조도인에서 실시된 예식의 재현 이미지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전기 나니와궁의 조도인 동 제1당의 발굴조사(1991년)

  • 후기 나니와궁의 서방 관아
    오간문이 있는 구획

    후기 나니와궁의 조도인 서쪽에 남북으로 약 200m에 달하는 대규모 구획이 있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를 3등분하는 위치에 오간문(五間門) 2채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간문이란 정문에 기둥이 6개가 있고, 기둥의 간격이 5칸인 문을 말한다. 문 건축 양식으로는 최상급 구조다.
    이 문은 궁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158m 떨어진 위치에 있는데, 이는 조도인 서쪽 끝까지의 길이의 2배로, 계획적으로 위치를 선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획의 서쪽 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동서 폭이 120m 이상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 구획의 안쪽 건물은 지금까지 거의 발견되지 않아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격식이 높은 오간문이 2곳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구획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 오간문의 발굴조사(1985~1986년)

    오간문 구획의 주혈과 기와 출토 상황(1976~1977년)

    연화문 수막새·당초문 암막새

    후기 나니와궁의 오간문(五間門)이 있는 구획의 북쪽 끝, 남북 방향의 굴립주식 담이 서쪽으로 굽어진 부근의 주혈(기둥 구멍)에서는 연화문 수막새와 당초문 암막새만 출토되었다. 스이타시의 나나오 기와 가마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긴 것이 확인되었다. 후기 나니와궁에 사용된 막새는 비교적 이른 단계에 만들어졌고, 후에 응회암을 사용한 도랑 등으로 교체된 오간문 구획에 중권문(重圏文) 막새가 아닌 연화문과 당초문 막새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연화문 수막새와 당초문 수막새

  • 조도인을 구획하는
    회랑과 진흙담

    고대 궁전에서 조도인은 국가적인 행사나 예식, 외국 사절의 알현을 하는 장소이자 귀족이나 관료가 정무를 보는 곳이었다. 전기 나니와궁, 후기 나니와궁 모두 중앙은 광장으로 되어 있었고, 양쪽에 귀족과 관료가 앉는 조도(朝堂)라 불리는 건물 여럿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전기는 주위에 기둥이 3열로 서 있는 복랑(複廊)이라는 격식 높은 구조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고, 후기는 남면 및 북면이 복랑으로, 동면 및 서면이 진흙담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조도인의 규모와 넓이를 알기 쉽도록 조도의 건물과 회랑, 진흙담의 위치를 지표면에 표시하였다. 둘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전기는 낮은 위치에 빨간색 포장으로 표시하였고, 후기는 기단이 연상되도록 높은 곳에 표시하였다.

    전기 나니와궁의 조도인 서면 회랑과 조도의 발굴조사(1965년)

    전기 나니와궁 조도인의 서 회랑과 조도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후기 나니와궁 조도인의 서 진흙담과 조도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전기 나니와궁 서 팔각전

    남서쪽에서 본 전기 나니와궁 서 팔각전원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전기 나니와궁에서 가장 중요한 구획인 다이리의 정면을 장식하며, 더욱 위엄있게 보이도록 정문인 다이리 남문의 동과 서 양쪽에 팔각형 누각을 배치하였다. 이 건물의 내부 기둥은 주혈(기둥 구멍)의 한 변을 경사로 깎아 넓힌 특수한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기둥은 그 규모가 큰 2층짜리 누각인 것으로 추측된다. 평면 규모는 팔각형의 맞변간 거리가 약 17.5m로, 일본에서 가장 큰 팔각형 건물이다. 주위는 기둥이 3열로 서 있는 복랑(複廊)이라는 격식 높은 구조의 회랑이 둘러 싸고 있었다.
    다이리 남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대칭되는 위치에 동일한 규모, 동일한 형식의 동 팔각전이 세워졌다는 사실이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서 팔각전의 발굴조사(1983년)

    동 팔각전의 발굴조사(1988년)

    팔각전의 기둥을 세우는 방법과 그 재현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 후기 나니와궁 대극전

    대극전 발굴조사(1970~1971년)

    후기 나니와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대극전이다. 국가의 중요한 예식과 행사, 외국 사절의 알현 등이 있을 때 천황은 대극전에 출어하였고, 남쪽의 조도인 중앙에 있는 광장에 귀족이나 관료가 정렬하였다. 대극전 중앙에는 천황이 앉는 고어좌(高御座)가 있었다.
    발굴조사로 확인된 기단의 평면 크기와 응회암으로 된 당시의 마름돌 출토품을 토대로 기단의 크기, 모양을 추정하고 현지에 복원하였다. 대극전의 규모는 정면이 9칸(약 35.2m), 측면이 4칸(약 14.6m)으로 추정된다. 기단의 높이는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계단의 크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2m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붕은 기와였으며, 중권문(重圏文)이라 불리는 막새가 사용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대극전 복원 이미지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대극전 내부 공간 복원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중권문 막새

    후기 나니와궁의 대극전원과 조도인의 지붕에 사용한 대부분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동심원과 호선·곽선으로 된 중권문(重圏文)이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고대 공전이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막새의 문양 대다수가 연화문, 당초문인 것과 다르게 이 궁전을 특징짓는 기와다.

    후기 나니와궁의 특징인 중권문 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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